루이페르디낭 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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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페르디낭 셀린은 189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의사이자 소설가로 활동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2년 소설 《밤 끝으로의 여행》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셀린은 독특한 문체와 인간의 비참함을 그린 작품으로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930년대 말부터 반유대주의적인 팸플릿을 출판하고 나치 협력 혐의로 논란을 빚었다. 그는 1961년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과 사상은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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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끝으로의 여행》은 루이페르디낭 셀린이 발표한 소설로, 주인공 페르디낭 바르다무의 여정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 사회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고통을 비관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 반유대주의 문학 - 베니스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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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페르디낭 셀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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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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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 페르디낭 오귀스트 데투슈 |
출생일 | 1894년 5월 27일 |
출생지 | 쿠르브부아, 프랑스 |
사망일 | 1961년 7월 1일 |
사망지 | 뫼동, 프랑스 |
직업 | 소설가, 팸플릿 작가, 의사 |
배우자 | 뤼세트 데투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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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활동 | |
장르 | 프랑스 문학, 사실주의, 실존주의 |
영향 | 많은 실존주의자, 촌상 류, 나카가미 겐지, 마 쇼, 아베 카오루 (색소폰 연주자), 오에 겐자부로, 장폴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 레몽 크노, 짐 모리슨 등 |
대표작 | 밤의 끝으로의 여행 (1932) 외상 죽음 (1936) 성에서 성으로 (1957) 북 (1960) |
2. 생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실존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던 처녀작 『밤의 끝으로의 여행』과 『가물가물한 죽음』, 『전쟁』, 『기뇰즈 밴드』(페르디낭 3부작 또는 전기 3부작으로 불림)는 과격한 내용과 비속어, 속어를 섞은 문체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벌레들을 짓뭉개라』, 『시체파』, 『고난』 등 반유대주의적 평론과 정치 팸플릿을 다수 집필하여 국가 반역죄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 덴마크 등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특사 후 발표한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망명 시기 생활을 허실을 섞어 묘사한 『성에서 성으로』, 『북쪽』, 『리고동』(망명 3부작, 전쟁 3부작, 독일 3부작, 후기 3부작 등으로 불림)은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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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 파리 서부 교외 쿠르브부아에서 출생. |
1899년 ~ 1907년 | 파리 2구 파사주 쇼아즐(Passage Choiseul) 64-67번지에 거주. 어머니가 부티크를 개업. |
1912년 | 18세에 지원병으로 입대. |
1914년 | 오른팔 부상, 훈장 수여 후 입원, 이듬해 제대. |
1919년 | 에디트 포레와 결혼. |
1922년 | 파리 대학교 의학부에 편입. |
1924년 | 『젬멜바이스의 생애와 업적』으로 박사 학위 취득. |
1932년 | 『밤의 끝으로의 여행』 출판. 큰 반향으로 문단의 총아가 됨. |
1936년 | 『대가 없는 죽음』 출판. 전작과 달리 비난을 받음. |
1943년 | 뤼세트 아르망조르와 결혼. |
1944년 | 덴마크로 망명하기 위해 출국. |
1945년 | 코펜하겐에서 프랑스 정부 요청으로 구금. |
1950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독 협력 죄로 유죄 판결. |
1951년 | 제1차 세계 대전 군공으로 특별 사면, 귀국. |
1957년 | 『성에서 성으로』 출판, 문단 복귀. |
1961년 | 『리고동』 탈고 직후 뇌졸중으로 사망. |
2. 1. 파리에서 보낸 젊은 시절
루이페르디낭 데투슈는 1894년 파리 근교 쿠르브부아에서 페르디낭 데투슈와 마르그리트 기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01][102] 그의 아버지 페르디낭 데투슈는 보험 회사 직원이었다.[4][5] 1897년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고, 셀린은 슈아죌 상점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1900년 셀린은 공립 학교에 입학했다. 5년 후, 그는 공교육으로 복귀하기 1년 전 동안 가톨릭 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유학하며 언어를 습득했다.[5]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아프리카
1912년, 셀린은 프랑스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7] 랑부예에 주둔한 제12 기갑연대에서 3년간 복무했다.[5] 처음에는 군 생활에 불만을 품고 탈영을 고려했지만, 적응하여 결국 하사관 계급을 얻었다.[8] 1913년 병장이 되었고, 1914년 5월 5일 하사관으로 승급하여 20살 생일 몇 주 전에 부사관이 되었다. 3개월 후 그의 연대는 플랑드르옥시당탈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첫 전투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1914년 10월 25일 이프르 근처에서 독일군의 공격으로 다른 사람들이 주저할 때 자진해서 전갈을 전달하다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다.[9][10] (그가 나중에 주장한 것처럼 머리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평생 심한 이명에 시달렸다.)[9][10] 포엘카펠 구역에서 팔을 심하게 다치며 위험한 연락병 일을 한 공로로 1914년 11월 24일 셀린은 전투 메달과, 소급하여 은별로 장식된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전공은 <릴리스트레 나시요날>에 상세히 기재되었다. 그의 용감함으로 그는 11월에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고, 1년 후 주간지 ''일뤼스트레 나시오날'' (1915년 11월)에 등장했다.[5] 그는 훗날 자신의 전쟁 경험이 그에게 "호전적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남겼다고 썼다.[11]
1915년 1월에 재수술을 받은 셀린은 전투 수행에 부적절하다고 판정되어 런던 프랑스 영사관(당시 계엄령으로 프랑스군이 영사관을 관리했다.)에 여권과 공익으로 재배치되었고, 이후 부상으로 인하여 팔의 70%를 못쓰게 되었다고 판정되어 제대했다.[12] 1915년 3월, 그는 프랑스 여권 사무소에서 일하기 위해 런던으로 보내졌다. 그는 밤에는 음악 홀과 런던의 어둠의 세계를 방문하며, 마타 하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12] 9월에 그는 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군에서 제대했다.
셀린은 런던에서 수잔 느부와 1916년 1월 19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영사관에 신고되지 않았고, 호적상으로는 독신이었던 셀린은 혼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프랑스 무용가 수잔 느보와 결혼했지만, 결혼은 프랑스 영사관에 등록되지 않았고 곧 헤어졌다.[13]
1916년, 셀린은 프랑스령 카메룬으로 가서 상가-우방기 산림 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농장과 무역소에서 감독관으로 일했으며, 현지 주민들을 위한 약국을 운영하며 프랑스에 있는 부모로부터 필수 의약품을 조달했다. 1916년 4월부로 플랜테이션 감독일을 시작했다. 병이 난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로 돌아가고자 배를 탔고 그 와중에 그는 단편 소설 <파도>를 썼다. 그는 1917년 6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식민주의에 대한 혐오감과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열정을 증가시켰다.[14]
2. 3. 의사가 되다
전후, 루이 페르디낭 데투슈는 렌에 자리를 잡고, 1919년 8월 10일 코트뒤노르의 캥탱에서 렌 의대 총장의 딸 에디트 폴레(Édith Follet)와 결혼하여 딸 콜레트 데투슈(Colette Destouches; 1920년 6월 15일 - 2011년 5월 9일)를 낳았다.[106] 1919년 바칼로레아에 합격한 후,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의학 공부를 계속하여 의사 학위를 취득했다.[107]1924년 6월, 셀린은 국제 연맹 보건부에 합류하여 아내와 딸을 렌에 남겨두었다.[19] 그는 록펠러 재단의 보조금을 받던 국제연맹 위생국에 고용되어 제네바에서 근무했다. 그의 임무는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 미국, 쿠바 등지에서 광범위한 여행을 포함했다.[19]
에디트는 1926년 6월 그와 이혼했고,[20] 몇 달 후 셀린은 제네바에서 미국인 무용수 엘리자베스 크레이그(1902-1989)를 만나 깊은 관계를 맺었다.[20] 셀린은 그녀를 "여제"라고 칭하며 《밤 끝으로의 여행》을 헌정하기도 했다.
2. 4. 작가가 되다
셀린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밤 끝으로의 여행>(1932년 10월 15일)에 등장하는 안티히어로, 페르디낭 바르다뮈의 모험을 써내려갔다. 그의 첫 작품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114] 세간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반응은 열광적인 찬사와 섞였다.[115] 이 소설로 셀린은 공쿠르상에는 떨어졌으나[116] (이 일은 뤼시앵 데카브로 하여금 공쿠르 평가위원을 사임하게 된다.[117] 데카브는 1939년까지 위원직을 맡지 않게 된다.) 르노도상을 받았다. 그는 서점에서의 큰 성공을 맛본다.1932년 10월에 출간된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광범위한 비평적 관심을 받았다. 데스투슈는 셀린이라는 필명으로 익명을 추구했지만, 그의 정체는 곧 언론에 의해 밝혀졌다. 이 소설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찬탄자와 비난자를 모두 끌어모았는데, 일부는 이 소설의 아나키스트적, 반식민주의적, 반군국주의적 주제를 칭찬했지만, 한 평론가는 이 소설을 "용기나 고결함이 없는 남자의 냉소적이고 조롱하는 고백"이라고 비난했다. Les Nouvelles littéraires의 평론가는 작가의 구어체 프랑스어 사용을 "자연스러움과 인공성의 극치인 특별한 언어"라고 칭찬했지만, ''Le Populaire de Paris''의 평론가는 이를 단순한 저속함과 외설함이라고 비난했다.[23] 이 소설은 1932년 공쿠르상의 유력한 후보였다. 상이 마젤린의 ''레 루(Les Loups)''에게 돌아가자, 이로 인한 스캔들은 셀린의 소설에 대한 홍보를 증가시켰고, 소설은 이후 두 달 동안 5만 부가 팔렸다.[24]
''밤의 여행''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셀린은 자신의 소명이 의학이라고 생각했고, 클리시 진료소와 개인 제약 연구소에서 계속 일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신용으로 죽다(Mort à Credit)'' (1936) (번역본 ''할부 계획으로 죽다'')가 되었다.
''신용으로 죽다''는 1936년 5월에 출판되었는데, 출판사가 외설 혐의로 기소될 것을 우려하여 삭제한 구절 때문에 수많은 공백이 있었다. 비평적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저속한 언어, 비관주의, 인간에 대한 경멸을 비판했다. 이 소설은 1938년 말까지 3만 5천 부가 팔렸다.[28]
2. 5. 반유대주의 "팸플릿" 시기
1930년대 말, 셀린은 학살을 위한 바가텔(1937)과 <시체들의 학교>(1938) 등 반유대주의적인 팸플릿을 출간하여 논란을 일으켰다.[118][119][120] 셀린은 왈테르 스트로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들에 대해 "제가 얼마 전 가증스런 반유대주의 책 한 권을 출간했는데, 당신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저는 유대인의 제일가는 적입니다."라고 스스로를 표현했다.[121]이 시기 셀린은 프랑스 친나치 극우파와 가까워졌으며, 특히 루이 다르키예 드 펠르푸아의 <라 프랑스 앙셰네> 잡지사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122] 또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프로파간다 부서인 벨트-디엔스트에서 일하던 아르튀르 판스틸과 접촉하여 관련 정보를 제공받았다.[118]
1939년 5월 10일, 셀린과 로베르 드노엘은 <학살을 위한 바가텔>과 <시체들의 학교> 출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1939년 4월 21일 통과된 마르샹도 법의 영향이었다. 이 법은 소수 인종을 보호하고 인종차별 및 반유대주의 관련 출판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123]
1942년 10월, 셀린의 반유대주의 서적 ''Bagatelles pour une massacre''와 ''L'école des cadavres''는 벨로드롬 디베르에서 프랑스 유대인 대량 검거 몇 달 후에 새로운 판으로 재출판되었다.[35]
2. 6. 점령기
점령기 동안 셀린은 직접 기사를 기고하진 않았으나 친독파 신문에 편지를 보냈고 그 중 몇 개는 게재되었다. 셀린은 그 편지에서 격렬한 반유대주의를 보였고 친나치 작가로 자리매김한다.[1] 이외에도 셀린은 점령기 동안 나치 독일 첩보 기관의 적극적인 요원으로 활동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공식적인 증거는 없으나 에밀 브라미는 피에르앙드레 타기에프와 안니크 뒤라푸르와 함께 셀린이 독일 선전부에 돈을 받고 일하는 요원이었으며 '최종적 해결'에 대해 알고 동의했을 것이라고 제시한다.[1]
1941년 3월 7일, 주간지 <주 수이 파르투>는 셀린과의 인터뷰를 개재했다.[1]
Citation|유대인에 관해 나는 최근의 두 책에서 최선을 다해 썼다... 그들은 지금 덜 오만하고 허세도 덜 부린다. 센에우아즈 의사들의 비서로 일하는 멘츠키에트즈비츠크(Menckietzwick)는 거기서 예외이다... 나는 사실 한 부인이 "유대인의 시대, 그들은 잘도 갉아먹었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프랑스어[1]
<우리의 투쟁 - 새 사회주의 프랑스를 위하여> 4호 (1941년 9월)에서, 앙드레 쇼메는 독자들에게 Bagatelles pour un massacre|학살을 위한 바가텔프랑스어의 짧은 단락들을 Céline nous parle des Juifs...|셀린이 우리에게 유대인에 관하여 말하다...프랑스어 (1937)라는 제목으로 발췌하여 보여준다.[1]
Citation|유대인의 의기양양함은 바로 인색함이다! 잘도 성공했다! 우리에겐 한탄의 세상! 20만의 잘 훈련된 순교자들이 바로 그 원인이다! 갑작스레 등장한, 창백한, 모욕받은 밤의, 고통의 세기의 박해자들!프랑스어[1]
2. 7. 망명 : 지크마링엔으로, 이후 덴마크로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셀린은 며칠 뒤인 6월 17일 아내 뤼세트와 함께 프랑스를 떠난다. 셀린은 원고는 남겨둔 채 위조 서류와 시안화 수은 알약 두 정, 그리고 뤼세트의 속옷 안에 꿰매 넣은 몇 백만 프랑[124]을 가지고 갔다. 부부는 나치 외무부가 비시 정부의 주요 잔당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징용한 바덴바덴의 브레너 파르크 호텔에서 재회한다.덴마크로 가는 데 필요한 비자를 얻지 못한 채, 둘은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가 베를린 북서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크랜츨린(셀린의 소설 <북쪽>에서는 초른호프로 나오는)으로 이송되었다.
비시 망명 정부가 지크마링엔에서 편성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셀린은 과거 비시 정부의 대변인이자 후에 그 정부를 주재하게 될 페르낭 드 브리농에게 지크마링엔에서 의사로 일하겠다고 약속한다. 페르낭은 이를 수락한다. 셀린은 열차를 타고 지크마링엔으로 갔다. 그는 <리고동>에서 이 여정에 관하여 상세히 다룬다. 1944년 10월 말, 셀린은 아내와 키우던 고양이 베베르와 함께 지크마링엔 성에 자리를 잡게 되고, 최후의 페탱주의자들과 비시 체제 시절 고위 관료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는 <성에서 성으로>에서 이 일화를 다룬다.
1945년 3월 18일, 셀린은 로렌 출신 헤르만 비클러의 도움으로 덴마크 비자를 받게 된다. 그는 1945년 3월 22일 지크마링엔을 떠나 5일 뒤 코펜하겐에 도착한다. 여전히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덴마크에서, 셀린은 자신의 옛 정부이자 무용수로 1942년 코펜하겐 은행으로 금괴를 보내 그의 자금 지원을 해준 카렌 마리 얀센의 아파트에 자리를 잡는다. 셀린은 금괴를 회수하여 암시장에서 덴마크 크로네로 환전한다.[41]
2. 8. 프랑스로 돌아오다
1951년 사면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한 셀린과 아내 뤼세트는 니스의 친구 집에서 살게 되었다.[126] 같은 해 10월, 셀린 부부는 오드센 뫼동 가르드 로에 위치한 낡은 건물로 이사했다.로베르 드노엘이 사망한 후, 셀린은 가스통 갈리마르와 계약을 맺고[125] <다음 번을 위한 몽환극> 출간과 <밤 끝으로의 여행>, <외상 죽음> 등 기타 작품의 재출간을 진행했다.[126] 수년간 셀린은 갈리마르가 가불해 준 돈으로 살았다.[128]
1957년, 셀린은 자신의 망명 생활을 미화한 "독일 삼부작"의 첫 작품인 『성에서 성으로』를 발표했다.[128] 이후 『북쪽』(1960), 『리고동』(1969)을 발표했으며, 이 세 작품은 하나의 소설을 이루며 셀린 자신이 직접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2. 9. 죽음
1961년 7월 1일 루이페르디낭 셀린은 뫼동 자택에서 뇌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129][130] 그는 아내 뤼세트 데투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129] 1961년 7월 4일, 뫼동 롱레아주(Longs-Réages) 묘지에서 로제 니미에, 마르셀 에메, 클로드 갈리마르, 막스 르볼, 장로제 코시몽, 르네 코시마, 뤼시앵 르바트, 기자 앙드레 알팡, 로제 그르니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소박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3. 셀린의 문체
셀린의 문체는 "문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창적이었다.[59] 그는 당시 전통적인 소설에 자신이 "경음악"이라 부른 리듬과 조화를 섞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장 폴의 영향을 받아, 은어뿐만 아니라 학술어, 일상어와 세련된 문체를 섞어 사용한 어휘는 빼어난 명석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문체는 절망과 해학, 격렬함과 다정함을 동시에 표현하며, 문체의 혁명과 반발하는 실재 사이에서 흔들렸다. 문학 비평가 가에탕 피콩은 <여행>을 "인간이 지금껏 소리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고함"이라고 평가했다.[59]
1936년에 발표된 <외상 죽음>에서 셀린의 문체는 더욱 과격해졌다. 짧은 문장을 사용하고, 말줄임표(...)로 분리된 감탄사를 자주 사용하는 등 형식적인 변화를 보였다. 문어체와 구어체를 결합한 이 작법을 통해 셀린은 감정을 표현하고 유발하고자 했으며, 이는 이후 발표된 그의 모든 소설에서 나타난다.[59]
셀린은 프랑스 문학 언어의 주요 혁신가였다.[69] 그는 첫 두 소설인 『밤의 끝으로의 여행』과 『할부로 죽이기』에서 노동 계급의 구어체 프랑스어, 의학 및 항해 전문 용어, 신조어, 욕설, 그리고 군인, 선원, 범죄 세계의 전문적인 속어를 사용한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다.[70][71] 또한 줄임표와 느낌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독특한 구두법 체계를 개발했다.[72] 그는 자신의 문체를 "작은 음악"이라고 불렀다.[73]
4. 작품 목록
셀린은 소설과 희곡, 에세이, 팸플릿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소설로는 밤 끝으로의 여행(1932)과 외상 죽음(1936)이 있으며, 희곡으로는 ''교회''(1933)가 있다. 또한, 에세이 ''Mea Culpa''(1936)와 팸플릿 학살을 위한 바가텔(1937), 시체들의 학교(1938)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냈다.[19][29][30]
4. 1. 소설
제목 | 원제 | 출판사 (파리) | 출판 연도 | 대한민국 내 번역서 |
---|---|---|---|---|
밤 끝으로의 여행 | Voyage au bout de la nuit | 드노엘 출판사 | 1932 | |
외상 죽음 | Mort à crédit | 드노엘 & 스틸 | 1936 | 이형식 옮김, 『외상죽음』, 중앙일보사 (1984) |
꼭두각시 밴드 | 'Guignols Band'' | 드노엘 | 1944 | |
전쟁 | Casse-pipe | 샹브리앙 출판사 | 1949 | |
다음 번을 위한 몽환극 | Féerie pour une autre fois | 갈리마르 출판사 | 1952 | |
노르망스 : 다음 번을 위한 몽환극 II | Normance : Féerie pour une autre fois II | 갈리마르 | 1954 | |
성에서 성으로 | 'Dun château lutre | 갈리마르 | 1957 | |
북쪽 | Nord | 갈리마르 | 1960 | |
런던의 다리 / 꼭두각시 밴드 II | 'Le Pont de Londres / Guignols Band II'' | 갈리마르 | 1964 | |
리고동 | Rigodon | 갈리마르 | 1969 |
4. 2. 기타 작품
- ''필립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의 삶과 작품'' (1924, 의학 논문)
- ''교회'' (1933, 희곡) L'Église|레글리즈프랑스어 [19]
- ''Mea Culpa'' Mea Culpa|메아 쿨파프랑스어 (1936, 에세이) [29]
- ''학살을 위한 바가텔'' (1937, 팸플릿) Bagatelles pour un massacre|바가텔 푸르 엉 마사크르프랑스어[30]
- ''시체들의 학교'' (1938, 팸플릿) Ecole des cadavres|에콜 데 카다브르프랑스어 [30]
- ''Les Beaux Draps'' Les Beaux Draps|레 보 드라프랑스어 (1941, 팸플릿)
- ''Y 교수와의 대담'' (1955) Entretiens avec le professeur Y|앙트르티앵 아베크 르 프로페쇠르 이그레크프랑스어
5. 정치,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1930년대 말, 셀린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적 내용을 담은 두 팸플릿, 《학살을 위한 바가텔》(1937)과 《시체들의 학교》(1938)를 출간했다.[118][119][120] 그는 스스로를 "유대인의 제일가는 적"이라고 칭하며 프랑스 친나치 극우파와 가까워졌다.[121][122]
1939년, 셀린과 그의 출판사는 《학살을 위한 바가텔》과 《시체들의 학교》 출판을 중단했다. 이는 소수 인종을 보호하고 인종차별 및 반유대주의 출판을 막기 위한 마르샹도 법의 영향이었다.[123]
점령기 동안 셀린은 친독 신문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격렬한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드러냈고, 친나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그는 나치 독일 첩보 기관의 적극적인 요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밀 브라미 등은 셀린이 독일 선전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최종적 해결'에 대해 알고 동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41년, 셀린은 한 인터뷰에서 "유대인에 관해 나는 최근의 두 책에서 최선을 다해 썼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49]
1942년, 프랑스 유대인 대량 검거가 이루어진 벨로드롬 디베르 사건 몇 달 후, 셀린의 반유대주의 서적들이 재출판되었다.[35] 그는 협력 언론에 자신의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담은 글을 기고하며, 나치 협력자로 지목되기도 했다.[37]
셀린의 초기 소설에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학살을 위한 바가텔》과 《시체들의 학교》에서는 맹렬한 반유대주의가 드러난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프랑스 극우파에게 환영받았지만, 일부는 그의 과격한 표현을 우려하기도 했다.[47] 전기 작가 프레데릭 비투는 "셀린은 전쟁 전 반유대주의의 가장 인기 있고 웅변적인 대변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48]
셀린은 파시스트가 아니며 어떤 파시스트 조직에도 가입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1941년에는 프랑스 극우파 통합을 위한 단일 정당 결성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55]
전쟁 이후, 셀린은 협력주의 활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57] 비투는 "셀린의 저작은 프랑스 이데올로기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고, 반유대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지지했으며, 결과적으로 독일에 대한 자만을 조장했다"라고 평가했다.[58]
6. 유산과 영향
셀린은 20세기 프랑스 소설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76] 조지 스타이너는 "20세기 서사의 어법과 감성으로 이어진 두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셀린과 프루스트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77]
셀린은 인간 조건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과 독특한 문체로 인해 현대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78] 부조리 작가인 사르트르와 카뮈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카뮈는 셀린의 극단적인 비관주의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다.[79] 알랭 로브그리예는 셀린을 ''누보 로망''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았으며, 귄터 그라스 역시 셀린의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78] 패트릭 모디아노는 셀린을 스타일리스트로 존경하며, 데뷔 소설 ''라 플라스 드 레투알''에서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다.[80] 헨리 밀러, 윌리엄 S. 버로스, 커트 보니것 등도 셀린에게 영향을 받은 미국 작가들이다.[81][82]
셀린은 프랑스에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2011년, 셀린 사망 50주년을 맞아 프랑스 문화와 관련된 500명의 인물과 사건을 기념하는 공식 목록에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그의 반유대주의적 저술 때문에 프레데릭 미테랑 프랑스 문화통신부 장관에 의해 목록에서 삭제되었다.[83]
2017년 12월, 프랑스 정부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갈리마르가 셀린의 반유대주의적 책들을 재출판하려는 계획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84] 2018년 1월 갈리마르는 출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고,[76] 3월에 학술적 소개와 함께 책의 비평적 판을 출판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85]
2020년 3월, ''리베라시옹''의 기자 장피에르 티보다가 셀린의 미발표 원고 컬렉션을 낭테르 경찰에 넘겼고, 2021년 8월에 공개되었다. 이 컬렉션에는 ''왕 크로골드의 의지''[86], ''런던'', 그리고 이미 출판된 작품(''지옥'', ''빚으로의 죽음'', ''밤의 끝으로의 여행'')의 6,000페이지 분량의 미발표 원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원고들은 셀린이 1944년 파리를 떠난 이후로 분실된 상태였다.[87][88] 프랑스 작가이자 셀린 전문가인 다비드 알리오는 이러한 글들이 완전히 평가되고 출판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89] 2021년 9월 ''더 유대 크로니클''에 기고한 올리버 캄은 셀린을 "잊혀져야 할 프랑스 문학 영웅"이라고 묘사했다.[90] 셀린의 잃어버린 원고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발견 중 하나이자, 가장 문제적인 발견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91]
2022년 5월, 셀린의 ''전쟁''이 갈리마르에 의해 출판되었고,[92] 2022년 10월에는 ''런던''이 뒤를 이었다.[93] 후자의 소설은 1934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유대인 의사를 주요 등장인물로 포함하고 있다.[94]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젊은 시절 셀린에게 열광했으며, 실존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공쿠르상 후보에도 올랐던 처녀작 『밤의 끝으로의 여행』이나 『가물가물한 죽음』, 『전쟁』, 『기뇰즈 밴드』(이른바 "페르디낭 3부작" 혹은 "전기 3부작")는 과격한 내용이나 비속어, 속어를 섞은 문체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벌레들을 짓뭉개라』, 『시체파』, 『고난』 등의 반유대주의적인 평론과 정치적 팸플릿을 다수 집필했다. 그 때문에 전후에는 국가 반역죄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덴마크 등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다.
특사 후에 발표한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망명했던 시기의 생활을 허실을 섞어 묘사한 『성에서 성으로』, 『북쪽』, 『리고동』(이른바 "망명 3부작", "전쟁 3부작", "독일 3부작", 또는 "후기 3부작")은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인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셀린의 반유대주의 문서는 미망인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지만, 2012년에는 연구자 레지스 테타만지에 의한 교정판이 퀘벡의 출판사 Éditions 8에서 출판되었다.[96] 프랑스에서도 갈리마르가 복간을 계획했지만, 유대인 단체의 항의를 받아 2018년 1월에 중단되었다.[97] 일본어판은 국서간행회에서 출판되고 있는 전집으로 읽을 수 있다.
찬반 양론이 갈리는 작가이지만, 트로츠키, 헨리 밀러, 롤랑 바르트, 레이몽 크노, 커트 보니것, 나카가미 겐지 등이 페르디낭 셀린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 『가물가물한 죽음』의 낭독 및 인터뷰를 녹음한 레코드가 CD화되었으며, 자작자연의 샹송 등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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